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姓名: 孙福顺
出生:1935-10-18
逝世:2022-08-11
祖籍: 黑龙江省铁力
宗教: 基督教
职业: 务农 |
姓名: 金韩柱
出生: 1922-07-16
逝世: 1991-10-01
祖籍: 长文里
宗教: 其它
职业: 务农 |
김한주(주자 돌림), 1922년9월7일생, 한국 전라북도 정읍시 고부면 장문리에서 김화준(화자 돌림,1901년생,1968년,67세애 돌아 가셨고,부안김씨로 추측됨.)의 맏아들로 태여 났다. 그때 당시의 대한민국은 일점 시대였고 많은 젊은이들은 일본으로 돈벌이를 나섰었다. 그 시대의 전 대한민국은 엄청 고난에 시달렸고 시민들의 생활은 입에 풀칠하기조차 어려운 형편이였다. 8살때 할아버지는 일본인이 운영하는 술 판매 집에서 술을 담은 독을 밀차에 밀고 다니면서 돈벌이를 하였고, 8살 어느날에 술독을 담은 밀차가 할아버지 다리를 깔어 놓어면서 엄청큰 살이 달아나면서 뼈가지 다치게 되였다. 이 상처는 할아버지에게 평생 큰 흉터뿐만 아닌 다리까지 다쳐서 걸음거리마저 약간 절룩이였다.
생활이 힘들어지자, 노할머니(노할머니의 성이成임) 는 그때 당시 부자집 봉대순(奉大淳)으로 시집간 인물이 고운 노고모할머니(노할배 여동생) 집에 가서 주방장으로 일을 하였고, 처삼촌할아버지(노할머니 남동생)도 봉대순 집에서 잡일을 하였다. 배가 고픈 할아버지와 작은 할아버지는 자주 엄마를 찾어가서 밥주걱 밑에 있는 밥을 얻어 먹고 오고 하였고, 고모할머니 친척들이 많이 붙어 산다고 남편집에서는 많은 눈치와 눈총을 주었고, 상심을 많이 하셨다.
노 할아버지는 자기 동생이 시집의 고통을 받는것을 보고 마음이 아퍼서 노 할머니와 처 삼촌 할아버지는 그집에서 나왔다.
많은 젊은 이들이 일본에 돈벌이 나설시 할아버지의 외삼춘(성이 성成임, 노할머니의 성이成임 )은 망국의 치욕을 참어면서 일본에서 상사를 다니면서 무역일을 배워서 받은 월급에서 할아버지 공부하라고 노할머니한테로 돈을 부쳐주셨다고 한다. 하지만 워낙 생활이 힘들다 보니 집 형편에 보태느라 그돈으로 공부를 시키지 못하였다.
이래 저래 힘들게 목숨을 유지하면서 살다가, 1941년, 노 할아버지는 자기 동생과 자식 및 가족을 대리고 만주땅으로 오게 되였고 지금인 흑룡강성 하얼빈시 이란에 착륙하면서 살다가 노 할머니는 보내시고난후 흑룡강성 탕원현 탕왕향에와서 뿌리를 내리게 되였다.
할아버지는 첫부인과 김금화(큰딸) 김성규(독자), 김동순(딸) 자식 3명을 가지게 되였고, 감정이 맞지 않어서 첫부인과 이혼을 하고 탕왕향 동광촌으로 이사를 오게 되였고, 손복순 두번째 부인을 맏이 하였고 산하에 자식을 두지 않었다.
1979년 큰손자 김광식,, 1978년에 둘째 손자 김광운을 득하게 되였고 아버지의 사업에 큰 도움을 주지 못하여 항상 마음 아퍼하셨고, 마음이 비단이이여 서 마을에서도 인덕이 많으신 분이였고 위신도 꽤 높어셨다. 중국이 개혁개방하면서, 생활이 좀 좋아지시자 술을 많이 좋아하셨고,1991년 10월1일에 중풍으로 돌아 가셨다. 손복순 여사, 1935년 10월18일 생, 1953년, 18세 젊은 나이에 김한주에게 시집왔고 산하에 자식을 두지 않었지만, 생년에 자식은 없었지만, 1979년 큰손자 김광식, , 1978년에 둘째 손자 김광운을 득하게 되였고 두 어린 손자를 끔찍하게 키워줬어며 가문에서 맏이로써 위신이 매우 높았고, 마을에서도 며느리와 모범가족으로 선발되기도 하고, 마을에서 활동량이 꽤 많어셨다. 2022년8월11일 목요일 저녘 16시에 무병으로 노화로 복받고 돌아 가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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